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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여배우 김삼화

비운의 여배우 김삼화

김삼화, 그녀가 지금 어느 하늘아래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참으로 좋은 배우 였으나 불행한 배우였다고 기억한다.

1953년 7월 한국전쟁은 휴전이란 불안한 상태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3년간 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 재산을 잃고 허무주의와 정신적 공황속에서 방황하며 새로운 이상과 꿈과 희망을 찾게 된다. 이러한때 인간의 꿈을 충족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것이 연극과 영화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한 한국영화·연극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11-01953년 7월 한국전쟁은 휴전이란 불안한 상태에서 종전을 맞게 된다. 3년간 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과 재산을 잃고 허무주의와 정신적 공황속에서 방황하며 새로운 이상과 꿈과 희망 을 찾게 된다. 이러한때 인간의 꿈을 충족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연극과 영화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한 한국영화·연극은 새로운 르네상 스를 맞게 된다. 이 무렵 극단 신협과 대학 연극제는 새로운 연극인들을 배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교육기관으로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와 각 대학의 연극 서클이 활발하였다.

이런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가 바로 미모의 여배우 김삼화다. 이때 는 아직 엄앵란, 태현실 같은 별들이 뜨기 이전으로 이국적인 마스크에 프로에 가까운 무용실력을 겸비한 김삼화는 당대 유일의 학사출신배우였 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출신인 김삼화는 자존심이 강하고 콧대높은 여배 우였다. 1955년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 로 은막에 데뷔하였고, 1956년 에는 원로감독 윤봉춘선생이 감독한 < 논개> 에 출연하여 당시로서는 공전 의 대히트로 수많은 영화팬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특히 1956년 동경 에서 개최된 아시아 영화제에는 선배 배우인 <백치의 아다다> 의 라애심 과 < 시집가는 날>의 조미령과 함게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눈부신 미모와 교양을 지닌 지성으로 당시 각국의 대표들로부터 감탄과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김삼화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6살때부터 익힌 무용솜씨는 몇차례의 개인 발표회를 열어 천재무용가라는 호평을 받기도 할 정도였다.

김삼화의 두 번째 영화 <논개> 는 그녀의 주가를 하늘높은 줄 모르게 하였 고 김삼화는 인기가 오를수록 그의 도도함과 교만이 발동하여 언론과 영화잡지에서는 찬사보다 혹평받기가 일수였다. 그러한 김삼화를 가리켜 영화계의 참새들은 그녀는 연기력이 없다던가 막대기라던가 하는 혹평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것들이 그녀로 하여금 은막에서 사라지게 되는 하나의 이유라고 했다. 그녀의 연기력을 혹독하게 평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은막에서 사라지게된 이유를 연기력을 들고 있지만 그런 것이 김삼화를 은막에서 밀어내는 이유는 될 수 없었다.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근접하기 어려운 그의 성격과 교만을 나무래는 소리였을 뿐이다. 어찌되었던 그 무렵 김삼화의 배우로 서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1957년엔 <나는 너를 싫어한다>에 출연하였 고, 1958년에는 1년동안 네편의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 비련의 섬> < 영원한 내사랑> <이국정원> < 첫사랑> 등이었고 1960년에는 <견우직녀> 1961년에 <연산군> 1962년에는 <눈물어린 발자국> < 대도전> < 대 심천전> <새댁> <여자의 일생> < 폭군연산> 등 장장 6편의 영화에 출연 한 그녀에게는 생애 최고의 해이기도 했으나 1963년에 출연한 <차이나 타운>에서는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다음해 1964년에는 <명동 에 밤이오면> 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명동에 밤이 오면>은 배우 김삼화에게온 마지막 밤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대의 인기배우 김삼화가 어느날 갑자기 은막뒤로 사라지게 된데는 남모른 몇가지 사연이 있다. 1950년에 결혼한 김삼화의 결혼생활은 길 지못했다. 그가 결혼 12 년만에 이혼하게 된데는 당시 한국 영화계의 암 종과 같았던 한국 반공예술인단 단장 임화수의 악역이 작용하였다. 1958 년 영화촬영을 위하여 홍콩에 간 김삼화의 뒤를 따라 홍콩에 가 김삼화를 유혹해 보려던 임하수의 계획이 실패하자 서울로 먼저 돌아온 임하수는 홍콩에서 자신이 김삼화를 범했노라는 뜬소문을 퍼트려 남편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끝내는 1962년에 이혼에 이르게 된다. 자존심 강한 김삼 화로서 참으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무렵 남달리 딸을 사랑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김삼화는 방황하기 시작했고 은막과도 멀어 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세상에는 뜬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습관 성 마약을 한다던가, 제3 세계의 외교관들과 놀아났다던가 하는 근거없는 뜬소문으로 김삼화는 심한 정신적 공황을 느끼게 된다.

1965년인가 6년인가 기억은 희미하나 그녀는 내가 있는 만리동 영화사를 찾아왔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명동에 나가 저녁식사를 하는데 술을 몇잔 마시더니“김사장 나 출연좀 시켜줘… 요즘 제작자들은 배우하고 한컷트 해야 출연시켜준다며. . 오늘 우리 한컷트하자. .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 도도하고 자존심이 강한 김삼화가 이렇게 깨질수 있을까. . 한편 서글 픈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당신을 위한 시나리오를 써서 꼭 출연시켜 재기토록 해주겠다는 약속을하고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진심 으로 그녀의 재기를 위하여 <유성>이란 대본을 써 제작하려 하였으나내 사업이 어렵게되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김삼화, 그녀가 지금 어느 하늘아래 살고 있는지 죽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참으로 좋은 배우 였으나 불행한 배우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한국영화 반세동안 뜨고 지고한 배우가 어디 김삼화 뿐이 아니지만 그가 길이 기억되는 것은 그가 지닌 재능과 아름다움 때문인지 모른다.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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