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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불가능, 앤디 서키스

대체 불가능, 앤디 서키스

대체 불가능, 앤디 서키스

배우의 연기엔 몇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배역에 맞춰 신체를 적절하게 통제하거나 활용해야 하고, 알맞은 대사 처리 방식과 뉘앙스를 찾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관객은 배우의 그러한 행위를 통해 극에 접근한다. 활자로 정리된 서사를 구체적인 활동 이미지로 바꾸고, 작품이 품은 고유의 세계와 그 안의 인물들을 관객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기술. 연기는 곧 설득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배우가 자신의 외적 조건을 모두 지우고 카메라 앞에 선다면 어떨까. 관객을 온전히 설득하는 일은 가능한가. 그전에, 이것을 단순한 디지털 기술이 아닌 연기의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의 중심에 2000년대가 열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모션 캡처 기술과 배우 앤디 서키스가 있다. 모션 캡처의 발전은 곧 배우로서 앤디 서키스가 밟아온 행보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반지의 제왕>(2001~2003)과 <호빗>(2012~2014) 시리즈의 골룸, <킹콩>(2005)의 콩, 프리퀄로 재탄생한 <혹성탈출> 3부작(2011~2017)의 시저를 통해 우리는 배우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없다. 이 캐릭터들은 앤디 서키스라는 배우가 지닌 육체성을 뛰어넘어 발현됐다. 내면의 사악함을 작고 볼품없는 육체에 감춘 골룸과 7m의 키를 지닌 거대 고릴라 콩, 온몸이 털로 덮인 유인원 시저는 배우가 지닌 고유의 외적 조건과는 일치하지 않는 캐릭터들이다.

 
동시에 이 모든 캐릭터는 앤디 서키스의 육체성을 담보로 한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다. 촬영장에서 앤디 서키스가 입은 슈트는 그의 움직임을, 얼굴에 붙인 장치들은 그의 표정과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포착해 디지털 캐릭터의 것으로 입혔다. 배우의 신체와 감정 연기 모두를 흡수하면서도 그의 육체는 벗어나는 방식의 기술. 배우들이 애니메이션이나 CG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를 담당하고, 이후 CG와 실제 배우가 일부 장면에서 포개지는 영화적 실험들을 거쳐, 우리는 앤디 서키스를 통해 ‘인간 배우가 디지털 캐릭터를 온전히 연기할 수 있다’는 상식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방식이 처음부터 배우에게 심정적으로 순탄하게 적용됐던 것은 아니다. <반지의 제왕> 1편 촬영장에서만 해도 서키스는 ‘더빙 배우가 왜 현장에 나오냐’는 동료 배우들의 따가운 시선과 싸워야 했다. 전례 없는 연기의 길을 걷는 배우의 인정 투쟁은 영화 속 골룸이 느끼는 소외감과 같았다. 다행히 편견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더빙 배우로 캐스팅된 서키스의 풍부한 표정과 제스처를 본 피터 잭슨 감독이 모션 캡처 방식의 연기를 제안했듯, 현장의 동료들 역시 그의 연기에 감화하기 시작했다. 그건 서키스의 연기를 지켜본 관객도 마찬가지였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 이후 앤디 서키스의 삶은 달라졌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극 전문 배우로 무대에 섰던 정통 배우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첨단의 기술이 필요한 연기의 길을 걷게 됐다. 물론 서키스는 그 사이 모션 캡처 슈트를 벗고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002)를 비롯한 영화와 TV 시리즈, 저예산 독립영화부터 <프레스티지>(2006) 등 제법 규모 있는 영화들에 자신의 진짜 얼굴로 꾸준히 참여했다. <킹콩>에서 콩뿐 아니라 탐험선 요리사 럼피를 동시에 연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존재감을 가장 빛낼 수 있었던 작업은 모션 캡처 연기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앤디 서키스의 가치는 할리우드에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혹성탈출> 프리퀄 시리즈 얘기다. 1968년 첫 편을 선보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시리즈의 도전은 ‘인간의 지능을 지닌 유인원을 어떻게 진짜처럼 만들어 낼까’에 첫 번째 방점이 찍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1년 팀 버튼의 리메이크까지만 해도 배우들이 특수분장계의 전설 릭 베이커의 손을 빌려 탄생한 인형 탈을 뒤집어쓴 채 연기해야 했지만, 이후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더불어 앤디 서키스와 같은 ‘뉴 타입’ 배우의 출연으로 인해 디지털 캐릭터와 실사 캐릭터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졌다. <혹성탈출>이 새롭게 시리즈를 시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던 셈이다.

 
“No!” 1편에서 인간에 저항하는 유인원 시저의 한 마디는 강렬했다. 인간만의 것이라 어겨졌던 사고(思考)와 언어가 하나로 강하게 응축돼 나온 외마디였다. 전 세계 관객을 전율케 한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서키스는 유인원 시저를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위엄을 갖춘 캐릭터로 완성시켜 나갔다. 기술의 진화는 때론 피로감을 동반하는 시각적 공해로 변질되어 왔지만 <혹성탈출> 프리퀄 3부작은 달랐다. 이 시리즈는 기술이 영화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 그리고 배우의 연기와 얼마든지 탁월하게 공명할 수 있는 것임을 증명했다.

 
앤디 서키스가 <혹성탈출> 시리즈의 주인공 시저로 살아온 세월은 7년이다. 그 사이 남다른 지능을 지니고 태어난 아기 침팬지, 자신이 인간의 애완동물이 아님을 자각하고 진화하는 유인원, 종족 전체를 이끄는 리더까지 시저의 성장과 삶 전체가 고스란히 앤디 서키스의 몸을 통과했다. 배우에게 이 경험은 연기 외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국제 동물 보호 협회 PETA에 가입했고, 영화 촬영에 야생 동물이 동원되는 것에 적극적으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 CG와 모션 캡처를 이용한다면 불필요한 촬영 방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편부터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모든 영장류 캐릭터는 배우들이 직접 연기했다. 구강구조의 변형을 위해 의치를 끼거나, 긴 팔로 보행하는 영장류 특유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길이가 짧은 목발을 쥐는 등 다양한 시도를 경험한 서키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앤디 서키스에게 모션 캡처 연기의 노하우를 묻는다. 그때마다 서키스가 내놓는 답변은 간결하다.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모션 캡처 연기는 배우의 연기를 다른 방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 일종의 기술적 방법론일 뿐이다.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할 것인가. 이 질문이 오직 서키스가 보여주는 연기의 처음이자 끝에 자리한 단 하나의 문장이다.

 
그가 지난 2012년 모션 캡처 전문 스튜디오인 이미지나리움(imaginarium)을 설립한 것은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기 위해서다. 그는 모션 캡처 연기가 “제작자들과 연출가들이 더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도록 영감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서키스는 이 상황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배우이자, 시각효과 기술이 미래에 배우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오래된 불안을 잠재운 선구자다. 그를 통해 증명된 바, 기술은 결코 배우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시저의 여정은 끝났지만 앤디 서키스의 활동 계획은 앞으로도 빼곡하다. <스타워즈: 더 라스트 제다이>와 <블랙 팬서>는 이미 촬영을 마친 뒤고, 새롭게 제작되는 <틴틴의 모험> 시리즈의 하독 선장으로 돌아온다는 루머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2018년에 이미지나리움 스튜디오가 선보일 실사 영화이자 그가 연출을 맡은 <정글북>에서는 갈색 곰 발루를 직접 연기하기도 한다. 사소하게 남아있는 문제라면 요 몇 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둘러싸고 불거진, 앤디 서키스와 같은 사례를 연기상 후보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냐 정도다. 지금으로선 인정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 보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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