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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훈의 리와인드 [누구의 것도 아닌 ‘블루’ <문라이트>]

문성훈의 리와인드 [누구의 것도 아닌 ‘블루’ <문라이트>]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란 존재는 더 이상 어제의 ‘나’일 수 없으며, 내일 도래하게 될 ‘나’를 곧 오늘의 ‘나’와 동일한 존재로 섣불리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세월이 되었든,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인연이나 크고 작은 성찰을 빚은 경험들이 되었든, 삶이라는 풍파는 동일한 이름하의 한 존재 가운데 각기 다른 여러 얼굴들을 새겨 넣기 일쑤다. 구태여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더라도 제각각의 이질적인 얼굴들로 세상과 마주하게 될 무수한 ‘나’는 비록 동일한 뼈와 살을 지닌 인간일지언정 자신에게 부여된 여러 이름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뭉뚱그려 삶이라 불리는 이러한 여러 이름들은 그 자체로 제각기 한 인간의 생애를 이루는 파편들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영화 <문라이트>에서 주인공 샤이론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민 마약상 후안은 자신을 ‘블루’라 불렀던 옛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달빛에 비친 어린 시절의 제 얼굴이 푸른빛을 띠어 사뭇 낯선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겠노라 선언했던 할머니와의 추억. 또래 아이들로부터 본래 이름보다도 ‘리틀’이라는 놀림조의 별명으로 불리기 일쑤였던 샤이론은 후안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블루’라는 애칭이 당신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냐고. 후안은 그렇지 않다며, 인간은 자신이 누구며 무어라 불릴지 스스로 정해야만 하는 존재라 답한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후안의 자신만만한 단언과는 달리, <문라이트>에서 그려낸 샤이론의 인생행로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 걸음을 내뻗는 주체적 여정에 가닿지 못한다.

마약거래로 피폐화된 80년대의 마이애미, 어머니마저 마약에 절어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사이 고독한 나날 가운데 처한 소년은 폐쇄적이고 냉혹한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자신의 남다른 성적정체성을 제대로 직시하기도 전에 그것을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기에 급급한 유년기를 보낸다. 그의 별명처럼 ‘리틀’이라는 부제가 달린 샤이론의 어린 시절은 제 존재에 대한 의식이 막 싹트기 시작할 무렵의 소년을 그리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앞날을 개척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던 후안의 말과는 달리 뜻하지 않은 우연과 만남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애초 자신이 선택치 않았던 낯선 이름과 얼굴을 마치 상흔처럼 그의 존재에 각인시킨다.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의 일대기를 그려나감에 있어 구태여 그가 처한 계급적, 인종적 위상 혹은 성적 소수자로서의 처지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흑인과 빈민, 동성애자라는 몇 가지 코드만으로 그를 규정짓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 영화는 샤이론의 외겹을 이루는 여러 요인들에 대한 섣부른 선입견에서 벗어나, 그러한 요인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 ‘창조’된 한 인간의 얼굴에 주목할 것을 강변한다. ‘리틀’이라 불렸던 숫기 없고 내성적인 소년은 세월이 흘러 근육질 체구의 위협적인 마약상 ‘블랙’으로 변모했지만, 온전한 애정과 진실어린 관계의 온정으로부터 소외된 어린 시절의 외로움은 긴 세월을 지난 그의 거친 얼굴 가운데에도 고스란히 흔적을 남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 성년에 이른 샤이론의 이질적인 외양에서, 동일한 존재의 자취를 드러내는 것은 어느덧 천형처럼 체화되어버린 그의 고독뿐이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의 친구 케빈과 재회한 샤이론은 마약상으로서의 음침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은 채 마치 유년기의 ‘리틀’로 되돌아간 듯 수줍은 모습이다. 청소년기의 은밀한 추억을 간직한 두 사람은 너무도 달라진 서로의 외양에서 지나온 시간의 두터운 무게를 새삼스레 체감한다. 비록 찬란하게 빛나는 추억의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년으로 되돌아간 샤이론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온 그 순간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의 감정에 북받쳐 오랜 시간이 흘러 재회한 친구를 향해 자신을 짓눌러온 상실감을 토로한다. 고독과 슬픔, 분노와 처연함으로 점철된 말없는 얼굴의 샤이론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지나온 세월의 고통을 소리 내어 고백하기에 이른다.

스스로 원하는 삶을 영위하기보다, 주어진 환경 가운데 강요된 삶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한 청년의 일대기는 비단 그가 속한 흑인 남성사회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고, 획일적이며 천편일률적인 ‘어른’으로의 성장을 강요받는 숱한 현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던진다. ‘리틀’ 혹은 ‘샤이론’은 그저 ‘블랙’이라 일컫는 흑인남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배태한 성장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각자의 색채를 발하며 영롱하게 빛나는 눈부신 순간에 해당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제각기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어스름 무렵의 달빛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고귀함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우리에게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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