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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00미터 800미터>와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 : 헤겔의 비극

영화 <500미터 800미터>와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 : 헤겔의 비극

단지 선/악이 불분명한 그 비극의 지 평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감독에게 감 사한다.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선보인 중국영화 두 편은 철학자 헤겔이 말한 비극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가 말한 비극은 두 개의 진실이 충돌하는 상황이다. 이게 어째서 비극적이냐고? 선/악이 뚜렷이 나뉘며 부딪칠 때 우리는 쉽게 한쪽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감정이입하며 응원한다. 반면 각자가 정당한 걸로 보이는 양쪽이 부딪칠 때 우리는 그만 길을 잃고 운명의 결말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헤겔은 이런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본 거다.

야오티안(요천, 堯天) 감독의 <500미터 800미터>에는 국가와 개인, 사회 발전과 생명의 가치가 충돌한다. 무대는 중국 삼협 댐 공사가 진행되던 인근 지역. 여인 홍펀은 남편과 어린 딸, 그리고 ‘진흙 인형’을 만드는 시아버지와 함께 해발 800미터 산골에 산다. 둘째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님에게 지성을 드리던 홍펀. 마침내 태기를 느낀 그녀는 보살님에게 감사하며, 산 잉어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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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미터 800미터500米800米>(2016)

큰 나무둥치에 모신 관세음보살, 산속을 감도는 안개구름, 부드럽게 퍼덕거리는 잉어, 그리고 화덕에서 구워낸 어린아이 형상의 진흙 인형이 생명의 신비와 충만함을 느끼게 한다. 어느 날 고지대 주민을 산 아래로 이주시키는 정부 정책에 따라 그녀의 가족 또한 이주하는데, 여기서 뜻밖의 시련을 만난다. 해발 500미터 아래로는 한 명의 자식만 가져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둘째를 유산시켜야 한다는 거다.

공무원들이 들이닥치자, 이웃들은 낫과 농기구를 들고 맞선다. 이윽고 그녀와 또 다른 임산부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산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아버지가 잡아준 닭을 먹고 떠나는 이들의 모습은 숭고하고 성스럽다. 빨치산이나 반정부군보다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2006)에서 생명을 지키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혁명을 위해 늦게 결혼하고 계획생육(生育)을 하자.” 계획경제, 계획생육, 모두 섬뜩한 말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잇단 실패로 식량·경제 생산이 한계에 다다른 중국 정부는 1978년부터 2자녀 정책, 1980년부터 한족을 대상으로 1자녀 정책을 강행한다. 나라가 자녀 숫자를 강제로 정한 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인 것 같은데, 당시 국가로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 정책이 아니었다면 현재 중국 인구수는 15억 명을 넘었고, 북한처럼 밥을 굶는 주민들이 많았을 거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그럼,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줘야 하나. 나라 전체의 앞날을 위해 법을 집행하는 쪽이 선한가, 아니면 생명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부에 맞서는 쪽이 선한가. 두 진실이 충돌한다. 두 패러다임은 또한 각자 타당한 도덕이 있다. 헤겔이 주목한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한다.

안티고네의 비극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를 저주하며 왕좌에서 내려오자, 풍비박산이 난 왕가를 수습하기 위해 안티고네의 숙부 크레온이 왕이 된다. 이에 불복한 안티고네의 오빠가 반란을 일으키다 죽자 크레온은 반역자에 대한 법에 따라 시체를 거두지 말라고 명령한다. 크레온의 생각은 정당하다. 그래야 최소한의 국가 질서와 왕가의 권위가 바로잡히니까.

반면 안티고네의 입장은 다르다. 오빠의 시신이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두는 것은 사람의 도리도, 가족의 도리도 아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오빠의 시체를 수습하는 이유다. 크레온이 대표하는 공동체 질서와 안티고네가 대표하는 인륜은 모두 정당하다. 이렇게 선한 두 축이 충돌한다. 진정 비극적인 것이다.

장치우(장계무, 臧啟武) 감독의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은 또 다른 각도에서 비극을 보여준다. 신장투석으로 연명하는 누이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 씨는 가난한 가장인 양 씨의 신장이 누이에게 이식할 수 있는, 희귀한 신장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부자인 이 씨는 양 씨에게 거금을 제안하고 양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씨는 양 씨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그의 가족을 따뜻이 대한다. 하지만 얼마 뒤 이식한 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이 씨는 다시 그를 찾아가고, 이번에는 고교생인 아들의 신장을 부탁한다. 양 씨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자 이 씨는 아들을 따로 만나 미국 유학과 이후의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아들 또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를 알게 된 양 씨는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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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지막 선택捐赠者>(2016)의 한 장면

이 씨는 선량한 사람이다. 누이를 사랑하고 ‘경우가 바른’ 사람이다. 그는 호소한다. 당신들은 신장 하나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누이는 그 신장을 이식받지 못하면 곧바로 죽는다고. 대신 당신들의 생활을 있는 힘껏 돕겠다고. 반면 양 씨의 입장은 다르다. 자신이 신장을 판 것은 가족의 앞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자신과 이 씨의 ‘인연’ 때문에 아들이 건강을 잃는다면, 그건 아버지의 도리가 아니다.

각자 일리가 있고, 타당하다. 양 씨가 이 씨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은 비극적이고 아름답다. 두 사람의 마음속처럼 휑뎅그렁한 골목길. 절박함 속에서도 온화한 미소를 띠는 이 씨와 절망에 찌든 양 씨의 퀭하고 무표정한 얼굴. 양보 없는 평행선의 아슬아슬한 평형을 깨뜨릴 것처럼 달려가는 고양이. 두 개의 타당한 패러다임이 충돌한다. 진정 비극적인 것이다.

헤겔은 비극의 주인공이 죽을 때 화해의 계기가 열린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선택>과 <500미터 800미터>에서 주인공은 범죄자로 기록되고, 사회에서 격리될 것이다. 사회적 생명의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이들은 전혀 떳떳하지 못할 것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새 생명을 얻는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선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화해에 관해선 <500미터 800미터>를 연출한 감독의 예명이 묘한 울림을 던진다. 야오티안은 ‘요(堯)임금의 하늘(天)’, <논어>에서 나온 말이다. “오직 하늘만이 높고 크거늘 요임금만이 하늘을 본받았다.” 감독은 하늘처럼 높고 넓고 공정한 이법을 화해의 틀로 삼고 싶은 듯하다. 참 어렵다. 필자는 단지 선/악이 불분명한 그 비극의 지평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감독에게 감사한다.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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