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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역두(驛頭)에서 너를 추억한다 옛 송정역

추운 겨울에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 무더운 여름엔 가장 시원하듯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낡고 오래된 역이라도 사람이 훼손하지 않으면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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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성만큼이나 사시사철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해운대해수욕장의 끝자락에 소가 누워있는 모습을 한  와우산의 꼬리 부분에 속하는 이름 미포(尾浦)에서 이제는 버려져야만 했던 철길을 따라 걸으면 작고 아담한 포구 청사포가 눈에 밟힌다.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을 마주치기라도 한 듯 청사포를 애써 외면한 채 묵묵히 지나다 보면 구덕포 너머에 드넓으면서도 한적한 바닷가 송정해수욕장에 이른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송정해수욕장에 가려면 달맞이길이 아닌 동해남부선 철로를 이용하곤 했다. 부전역에서 비둘기호에 몸을 담으면 콩나물시루 같은 객차에 부전시장을 다녀가는 촌로의 짐 보퉁이에선 짠물에 배인 생선 냄새와 향긋한 나물 냄새가 뒤얽혀 야릇하고, 매캐한 담배연기와 청바지에 통기타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수다가 뒤범벅이 되어도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낭만도 흘렀다.
동래역을 지나고, 안락역을 지나고, 해운대역을 지나자 만나는 파노라마는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 그리고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아우성이 ‘깃발’처럼 펄럭이다 만난 송정역이다. 마치 국화과에 속하는 반목성의 여러해살이 식물로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바닷가 바위 주변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낮게 엎드려 흰색에 가까운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해국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그 꽃의 꽃말 침묵처럼 조용한 역이다.
하지만 그 침묵은 또 다른 침묵을 잉태했다. 이유는 동해남부선 철로 이설공사로 2013년 12월 2일에 기적을 울리며 끼익 하는 금속성 파열음과 함께 정차하던 열차는 한 토막 끊긴 필름처럼 이어져오지 않았다. 1934년 영도다리가 처음 하늘을 향해 들어 오르던 그 해에 송정역도 생겼으니 80여 년 만의 일이다. 하여 이제는 열차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굳건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움에 찾아본 역사는 역시나 침묵이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라도 하듯 플랫폼에 선 채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별이 바람에 스치듯 오장환 시인의 <라스트 트레인>이 흐른다. “저무는 역두(驛頭)에서 너를 보냈다/비애(悲哀)야!//개찰구에는/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려 간다//대합실에 남은 사람은/아직도/누굴 기다려//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목 놓아 울리라//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저무는 역 머리에서 비애를 보내고 병들어버린 역사도 보내는, 보내고 싶어 하는 시인의 심정은 고통스러운 일제강점기에 그리움과는 도무지 관련이 없는 뼈아픈 현실을 보내고 광복의 열망을 담기 위해서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폐쇄된 역을 바라보는 괴로움은 차마 잃어버린 옛 영화처럼 가슴이 찡하게 아려온다. 그만큼 새로운 것은 편리함을 담보로 하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img3201그 편리함에 잃어버린 것은 송정역을 출발하자 열차의 차창 너머에 그려지는 바닷가 풍경이다. 동해남부선 철길 중에 가장 백미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까닭으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영화 <해바라기>(1970)에서 열차 차창 밖으로 소피아 로렌이 하염없이 바라보던 우크라이나 지방의 끝 간 데 없이 노란 해바라기 밭도 가히 인상적이지만, 송정과 미포 사이를 달리며 바라본 바다 풍경은 스치는 장면마다 움직이는 활동사진이요 명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낙담은 일렀다. 동안 폐역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역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아쉬움을 지우기라도 하듯 개발이라는 명제로 생뚱함을 더하기 일쑤였지만, 송정역은 온새미로 보존되어 역사적 가치를 누리고 있다. 등록문화재 지정이 그것이다. 거기에 시민 갤러리로 다시 단장되었으며 플랫폼이나 철길엔 여러 조형물이 설치되어 바쁜 일상에 일그러지듯 상처 난 현대인들의 환부를 어루만져 준다.
추운 겨울에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곳이 무더운 여름엔 가장 시원하듯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낡고 오래된 역이라도 사람이 훼손하지 않으면 변함이 없다. 다만 시원하고 따뜻한 곳만 바라기 하는 내가 이상하거나 나 혼자만을 위하여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침목 하나하나를 노둣돌 삼아 밟고 오른 내 마음의 열차는 정동진을 달리고, 두만강을 건너고, 바이칼 호를 가른다. 짧은 시간 옛 추억에 젖은 송정역에서의 생각은 종착역이 없이 이 세상 어디든 가고 또 가고야 만다.
무릇 생각해보면 세월의 뒤안길만큼이나 길고 먼 어둠의 터널 끝에 아득한 불빛 하나처럼 어디인들 그립지 않은 곳이 없으니까·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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