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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호 감독의 스토리지2 – 한여름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 유영길

하기호 감독의 스토리지2 – 한여름의,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감독 유영길

<8월의 크리스마스> 현장을 떠올리며. 유영길 선생님을 기리며.

여름이다. 올여름은 유난히 빨리 왔다. 여름이 올 때마다 나는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8월의 크리스마스>. 인생에 멘토라는게 있을 수 있겠냐만 <8월의 크리스마스>를 촬영한 유영길 선생님은 내 마음속 영원한 선생님,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어느 해 9월쯤이었을 거다. 우린 학교 앞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촬영 중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고 무작정 군산으로 향했다. 공소시효가 지났을테니 한마디 하자면 소주 두어 잔 걸친 친구가 운전을 했다. 정말 딱 두어 잔이었다. 군산하고도 월명동. 10년 된 구형 엘란트라를 끌고 가기엔 너무 어둡고 추웠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간 초원 사진관 앞에서, 선생님은 담배를 물고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왜 이리 늦게 왔느냐며 정말 걱정스럽게 물으셨다.

선생님이자 아버지 같은
촬영은 새벽이 되도록 계속됐다. 현장은 생각보다 너무나 조용했다. 한석규 선배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좁은 오픈세트 안을 돌아다녔고, 김동호 조명기사님의 스태프들은 조용하지만 일사불란하게 조명기를 세팅했다. 물끄러미 현장을 바라보던 유영길 선생님께서는 바깥으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불빛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뭔가 할 일이 생겨 신난다는 듯 친구는 우리의 늙은 차를 열심히 몰고 사진관 앞을 오갔다. 행여나 서울 차량 번호판이 보이지 않겠느냐 질문하자 선생님은 씩 웃으며 안보이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선생님께, 우린 마냥 귀엽고 어린 강아지 같은 제자들이었다. 우린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은 늘 우릴 동료로 대했다. 선생님의 촬영부 중 막내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는 내게 “학생들한텐 저렇게 자상하세요?”라고 물었다. 아마도 촬영부들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던 내내, 선생님은 우리와 밤새 술을 마시고 영화 이야길 해주셨다. “근데 한석규는 무슨 병에 걸린 거예 요?” 누군가 묻자 “글쎄…. 근데 그게 중요한가?” 라고 선문답 같은 말씀을 하셨다. 영화가 개봉한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인공이 걸린 병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다. 물론 유영길 선생님과 허진호 감독님께서는 알고 계셨겠지.

달빛을 닮은 가르침
선생님은 수업 내내 달빛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저 쓰레기통에 비친 달빛, 정말 좋지 않니? 저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학교 앞 주점에서 맥주를 들이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생님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지시곤 했다. 쓰레기통을 요리조리 돌려 보기도 하면서. 완성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정말 그 달빛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군산에 머무는 동안 선생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텔방을 내주셨다. 방을 내주시고 어디서 주무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알아서 잘 수 있다고만 하셨다. 난 선생님이 묵던 방에서 잘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할아버지 냄새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버지의 냄새라고 해야 하나. 무척 푸근한 느낌이었다. 그 방에서 우린 술을 마시며 그날그날의 촬영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유치한 토론이었다. “왜 한석규 선배는 질 않지?”“심은하의 감정이 폭발 해야 해!”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다가 술이 떨어졌고 “선생님 술 훔쳐 먹자!”하며 누군가 모텔방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술은커녕…, 온통 약들이 들어 있었다. 무슨 약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러 종류의 약들이었다. 순간 우린 모두 숙연해졌다. 선생님이 먹고 있는 약이라고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팠다. 선생님은 어디가 편찮으셨을까. 군산의 공기가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들뜬 마음 때문이었을까. 밤새 술을 마셔도 피곤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의 숙취는 선생님이 안내한 한일식당이라는 곳에서 뭇국을 먹었다. “이걸 먹으면 저녁 때 또 술을 마실 수 있다?” 선생님은 장난기 있게 말씀하셨지만 정말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해장국도 군산 월명동뭇국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먼 훗날 내 영화 헌팅을 하러 그 곳에 갔을 때 한일식당은 확장 영업 중이었다. 하지만 맛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눈, 나의 꿈이 되어준
나만의 기억인지 몰라도,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아껴 주셨다. 수업시간 조교가 녹차를 가지고 오면, “몸에 좋은 건 우리 기호가 먹어야지?” 하시며 내게 그 녹차를 건네주시곤 했다. 절룩거리며 교문으로 향할 때면 늘 당신의 차를 세워 나를 조수석에 태우시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셨다. 아마도 선생님은 나를 보며 먼저 떠난 아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드님이 이 세상의 소풍을 끝냈을 나이가 바로 내 나이라고, 형들이 얘기해 줬다. 나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몸도 약하다. 말할 수 없는 지병을 지금도 앓고 있다. 영화감독으로선 치명타일지 모른다. 촬영 수업도 어려웠다.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아 아이피스가 고정된 16밀리 카메라로는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비디오카메라를 수업시간에 쓰게 했다. 그리고 ‘줌 인 트랙 아웃’ 이라는 우리에겐 다소 어려운 수업을 실시하셨다. 난 늘 촬영 수업에 자신이 없어 뒤에서 쭈뼛댈 뿐이었다. 선생님은 날 보시더니 트랙 위 카메라 앞에 앉으라고 하시곤 아이피스를 쭉 뽑아 왼쪽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이렇게 하면 보이지?” 아이피스 앵글로, ‘줌 인 트랙 아웃’을 경험한 그때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와 씨발! 선생님 와 진짜 멋져요!” 정말이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자 조용히 모니터를 보고 계시던 선생님은 싱긋 웃으며 “기호야, 헤드룸이 너무 많이 남지 않니?” 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저 들떠서 건방지게 선생님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제 스타일이라고요!”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 스타일? 그래, 그 스타일로 쭉 가라. 좀 엉성하긴 하지만…. 안될 게 있겠니?”

<8월의 크리스마스>는 유영길 선생님의 유작이 되었다. 기술 시사 즈음 두 번째 뇌출혈이 찾아왔고, 결국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리고 아드님의 옆에 묻히셨다. 난 선생님의 장례식장에서 열심히 설거지했던 기억이 난다. 차마 영정 사진을 볼 수 없었다. 뭔가를 하긴 해야 했는데, 눈에 띈 것이 설거지였다. 설거지하다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왜 좀 더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왜 촬영 수업을 두려워했을까. 왜 좀 더 많은 걸 묻지 못했을까. 왜 선생님이 술 사준다 그러면 졸래졸래 좋다고 따라갔을까. 우리가 안 먹는다 그러면 선생님도 술을 조금 자제하셨을 텐데. 선생님은 촬영 중인 와중에도 우리 숙제 검사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는데. 수업도 열심히 해주셨는데. 촬영 수업마다 주눅이 들어 있던 내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쪽 눈 안 보인다고 영화 못 찍는 거 아니다. 훌륭한 촬영감독을 만나면 돼. 그리고 넌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랑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선생님, 제 데뷔작은 무조건 선생님이 찍는 거예요?!” 언젠가 건방지게 외쳤던 적이 있다.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네 엉성한 시나리오, 어디 한 번 보자…, 빨리 졸업하고 열심히 쓰려무나 하셨다. 그로부터 10 년 후쯤에나 나는 내 데뷔작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선생님의 산소를 찾아 마음속으로 이 영화는 이런 영화예요, 라고 줄거리를 말씀드렸다. 동료들은 기일마다 찾아뵈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왠지 데뷔가 결정됐을 때 뵙고 싶었다. 촬영감독을 결정할 시기가 왔다. 그때 막 데뷔 준비 중이던 동기 이태윤 촬영감독에게 내 시나리오를 건넸다. 내 글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동료였지만 신인 감독에 신인 촬영감독은 투자자나 제작자들이 선호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우린 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설득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태윤이 형에게 말 했다. “형, 내 눈이 되어줘.” 현장에서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마다 태윤이 형은 말했다. “유영길 선생님이었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못난 감독인 나는 영화를 흥행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태윤 형은 훌륭한 촬영감독으로 거듭났다. 다행이다 싶다. 시나리오를 쓸 때면 언제나 가상의 독자를 두고 쓴다. 그 중 한 명은 늘, 유영길 선생님이다. 시나리오에 ‘끝’ 자를 쓸 때면 여러 사람이 떠오른다. 주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낸 사람들이다. 나중에 그들을 만났을 때, 쪽팔리기 싫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열심히 소풍을 즐기다 왔노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 한석규 선배의 노래를 듣고 있다. 한여름의, <8월의 크리스마스> 현장을 떠올리며. 유영길 선생님을 기리며.
bfc

Christmas In August

2013.11.06 재개봉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 1998   네이버 영화정보 보기
개요 : 드라마, 멜로/로맨스 한국 97분 2013 .11.06 재개봉, 1998 .01.24 개봉
감독 : 허진호
출연 : 한석규(정원), 심은하(다림)
등급 : [국내] 15세 관람가

노트

유영길

  • 본명: 유영길
  • 한자명/영문명: 劉永吉 / You Young-gill
  • 출생년도: 1935년
  • 사망: 1998년 01월 16일
  • 대표분야: 촬영
  • 데뷔: 1968년도 – 나도 인간이 되련다
  •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출처: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인하공과대학 1학년이던 1956년, 2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구했는데, 우연히도 그 가정교사 자리가 양주남 감독의 집이었다고 한다. 호기심에 양주남 감독의 <배뱅이굿>(1957) 촬영 현장에 놀러갔다가 촬영부 일을 거든 것이 영화와 처음 맺은 인연이다. 그렇게 2학기 등록을 포기하고 영화판에 뛰어들어 촬영부로 일하게 된다. 5.16 이후 군기피자로 재징집되어 영화계와 멀어지고, 제대 후 동생과 철공소를 차린다. 그러나 1년 만에 철공소는 망하게 되고, 다시 유현목 감독의 <한>(1967)을 찍고 있던 장석준 촬영 감독의 촬영부로 들어가 영화계로 돌아온다(씨네21). 이후 유현목 감독의 <나도 인간이 되련다>(1968)에서 촬영감독으로 데뷔한다. 초기에는 최하원 감독의 <독짓는 늙은이>(1969), 유현목 감독의 <분례기>(1971) 등의 문예물을 작업하다가, 하길종 감독과 만나면서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이원세, 홍파 등의 감독들과 평론가 변인식이 함께 모여 만든 동인집단인 ‘영상시대’의 감독들과 많은 작업을 한다. 1975년에는 미국 CBS 서울지구의 사진기자로 일하게 된다. 단 입사 조건은 1년에 한편의 작품을 촬영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외신기자의 신분으로 그가 기록한 현장은 노동운동이 격렬하던 평화시장, 부마항쟁, 1980년 5월의 광주 등이었다. CBS 사진기자와 촬영감독을 병행하며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강우석 등 1980년대 중후반에 데뷔한 감독들의 데뷔작을 모두 맡아 촬영한다. 1991년 CBS 사진기자를 그만둔 이후, 영화에만 매진하여 박광수, 이명세, 배창호, 장선우 등 1980년대 데뷔하여 1990년대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른바 코리아 뉴웨이브로 불리던 감독들의 거의 모든 작품에 참여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현승, 이창동, 허진호 등의 감독들의 데뷔 작품을 맡아 촬영한다. 1990년대 이후로는 후배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영화아카데미와 영상원 등지에서 촬영에 대한 강의를 하는 한편 현장 촬영 역시 강행하나,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마지막 작품으로 세상을 뜬다.

* 참고문헌
이연호, “유영길 촬영감독 1968-1998년, 이제부터 우리들은 혼자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키노』, 37권(1998년 2월), 22~29쪽
“마지막 엔딩크레딧/촬영 유영길”, 『씨네21』 137호 (1998년 2월 10일)

[작성: 전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