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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들>, 죽음 또는 중심의 소멸

<풀잎들>, 죽음 또는 중심의 소멸

죽음과 중심이 소멸된 홍상수 생태계의 미래를 더 예측하는 것은 늘 그랬듯 불필요한 일이다.

13-4홍상수 영화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걷혔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풀잎들>의 서사에는 두 건의 자살과 한 건의 자살 미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장편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는 살인사건이 등장하지만, 이후의 영화들보다 죽음이 더 강하게 활동하지 않는다고. 감독의 초창기 영화부터 최근까지 죽음의 활동은 점점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의 영화에서 죽음의 기운은 시간의 틈새나 꿈속에 기입된 존재의 이미지가 일렁일 때, 현실과 실재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 해리와 기억 또는 환상과 경험이 교차할 때 우리에게 감각과 감정의 형태로 지각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죽음은 사건이나 서사로서 몸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얼룩이 새어 나오는 곳, 의미화 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그럴 때 죽음은 섬뜩하면서도 우리를 끌어당기는 사이렌처럼 손짓하는 존재다.

<풀잎들>에서 죽음은 실존적 두려움을 야기하거나 외상적으로 경험되는 것도 아니고 실재계의 매혹처럼 기능하지도 않는다. 틈보다는 면에 존재하는, 서사로서의 죽음은 오히려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잃고 현실의 부속물로서 위상을 갖는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대치할 수 없는 귀결이나 목표가 아니라 관계를 위해 불려 나온 구실처럼 보인다. 한 카페에서 배우로 알려지기 시작한 홍수(안재홍 분) 때문에 친구 승희가 죽었다고 미나(공민정 분)는 홍수를 거칠게 몰아붙인다. 한 식당에선 연인이었던 여자(이유영 분) 때문에 최 교수가 투신자살했다며 한 남자(김명수 분)가 그 여자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죽음, 자살은 그 자체가 가지는 아우라 대신 비난을 위한 가장 강력한 소재로 전락했다. 서사적 입장에서 죽음의 위치에 몰락, 광기, 떠남을 넣어도 관계가 없고, 우리 자신이 비난에 처했던 다른 상황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죽음이든 다른 형태의 불행이든, 타인의 불행을 이유로, 그것을 초래하였다는 구실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이 상황에 방점이 있다.

13-5홍수-미나가 있는 카페의 건너편 자리에서 죽음은 다르게 활용된다. 자살 미수를 하고 퇴원한 노년의 배우 창수(기주봉 분)는 오랜만에 만난 후배(서영화 분)에게 빈방에 얹혀살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다가 거절당한다. 죽음의 시도라는 배경도 의처라는 목적을 이루는 데는 역부족이다. 이들의 장면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얹혀살고 싶어서, 의지하고 싶어서, 젊은 사람한테”라며 내레이션을 하는 이는 아름 역의 김민희이다. 계속되는 “얼마나 좋을까, 저런 예쁜 후배한테 얹혀살고”라는 아름의 독백은 어색한 구애와 실패의 현실을 귀엽게 부연한다. 영화의 텍스트만이 이 장면을 귀엽게 느끼게 하는 요소가 아님은 물론이다.

13-아름은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며 느낀 점을 노트북 컴퓨터에 기록한다. 언급하였듯 단순한 관찰보다는 논평이 주를 이룬다. 공방 끝에 죽은 자에 대한 연민을 공유하는가 하더니 밤을 함께 보내기로 하는 홍수와 미나를 보면서도 아름은 한마디 한다. “내가 귀가 밝은 걸 모르지? 죽은 사람을 팔아서 지금을 행복하려 하는 거니? 그러면서 염치도 챙기고,잘한다.”며 비아냥거린다. 아름의 순수한 관찰/논평자 입장에 도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배우 경수(정진영 분)는 작가 지영(김새벽 분)에게 함께 지내며 글 작업을 해보자고 청하는데 역시 거절당한다. 지영이 볼일이 있다며 카페에서 떠나자마자 경수는 아름이 비범하다며 동일한 수작으로 들이대나 아름은 거절한다. 아름의 비범한 위치가 아직은 공략당하지 않았으나 플레이에 참여하는 수모를 겪었다. 앞서 창수의 구애/실패담처럼 경수는 지영과 아름을 통해 병살타를 쳤다.

13-2플레이에 가담할 뿐 아니라 살짝 전지적으로 보이는 아름의 위치는 결혼하겠다며 여자를 데려온 남동생 커플과 식사를 하면서 무너진다. 아름이 “결혼하려면 서로 잘 알아야지. 잘 모르면서 결혼하고 그렇게 그냥 살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엉망으로 사니? 모르면 결혼하면 안 돼. 어차피 해도 실패야. 사랑은 개뿔!” 하며 또 대사가 텍스트 밖으로 뚫고 나올 때까지도 어느 정도 그녀의 비범한 위치는 담보된다. 그런데 아름이 “미친놈, 벌써부터 여자에게 질질 매고”라며 분통을 터뜨릴 때 산통이 깨어진다. 자기가 식당에서 계산할 때 옆에 서 있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인물의 갑작스런 분노발작이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다지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전지적 캐릭터는 더 버텨낼 방도가 없다.

동심원의 중심이 되는 데 실패한 아름의 운명은 자명하다. 아름은 카페 사람들, 그들 사이에 끼어 앉는다. 영화의 맨 처음과 끝에서 카페 밖 고무대야에 놓인 풀잎들을 의도적으로 비춘다. 인물들과 서사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묶이며 겹쳐지는 풀잎, 그 다발들 같다. 연행자 혹은 연행의 지시 및 기록자, 수단으로서의 죽음 서사, 곧 비난, 구애와 구애의 실패, 텍스트 안과 밖의 상호작용 등이 겹쳐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영화의 구조 안에 아름이든 죽음이든 대야의 중심에서 꽃일 수 없다. 여기서 죽음과 중심이 소멸된 홍상수 생태계의 미래를 더 예측하는 것은 늘 그랬듯 불필요한 일이다. 어차피 안 맞을 터이므로.

b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