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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 왜 개똥의 연대는 말하지 않을까?

<로마> – 왜 개똥의 연대는 말하지 않을까?

‘그 하녀’를 위해 ‘그때’의 얼룩과 이별하는 중이다. “리보를 위하여.”는 그런 맥락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로마>가 개봉한지 3개월이 지났다.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고 본다. 이 영화의 의미, 성취에 대해선 보탤 말이 없다. 대신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어릴 때 원주민 하녀가 있었어. 우리 집이 좀 살았거든. 큰 누나 같은 존재였지. 집이고 가족이고 다 돌봤거든.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하녀 말이야. 임신하고 남자가 내뺀 거 있지. 그때 우리 아빠도 바람이 났어. 70년대가 좀 그랬잖아. ‘더러운 전쟁’ 알지? 좀 어수선했지. 그래도 우린 할 거 다 했어.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불구경도 하고. 엄마가 고생했지. 혼자 먹여 살렸거든. 사실 아빠가 집 나가고 가족이 더 딴딴해졌달까? 그 하녀까지 해서 말야. 바다에서 나랑 여동생을 구한 적도 있다니까? 수영도 못했다는데! 아아… 맞아, 자기 애는 결국 사산했지. 왜 그 내뺀 놈이랑 마주쳤는데 충격을 받았나 봐. 당시 반정부 시위하던 사람들 죽이고 그러던 남자들 있었잖아. 그 일원 같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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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드라마다. 영화상에 재현된 시대상도 그렇다. 막연한 불안감도 있지만 활기도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많은 수평 트래킹과 광각렌즈의 활용은 거리감을 준다. 단순 몰입은 어렵다. 카메라가 드러난다. 왠지 어린 쿠아론의 경험과 감독인 현재 위치가 공존하는, 1인칭 기억과 3인칭 시점이 만난 묘한 구성이다. 이 묘한 구성, 이 물리적 거리감이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직진하기 전에 물어보자. 위의 대화에 참여해보자.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꺼낸 거냐고. 여기서 <로마>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애매하다. 결말을 장식하는 “리보(그 하녀)를 위하여.” 뿐이다.

img634위에서 기술한 대화체는 자전적 드라마  <로마>의 합리적인 톤이라 해도 무방하다. 재현의 윤리를 따지자면 저렇게 기술하는 게 자연스럽다. 굳이 묘한 구성을 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저 “갑자기”란 물음이 중요한 것은 쿠아론이 <로마>를 연출한 직접적인 동기, 자전적인 주제에 클레오(그 하녀, 얄리차 아파리시오 분)가 주인공인 계기와 직결되는 탓이다. 그렇다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말자. 우리는 갑자기 누군가를 위한답시고 하는 얘기가 여하간 대상을 향한 관심이라는 걸 안다. 실제로 쿠아론의 <로마> 연출 동기는 그 하녀가 ‘직접’ 생각나서, 그 하녀가 주인공인 계기는 함께 살던 ‘그때’가 그리웠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라면 쿠아론의 관심은 직접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영화의 배경인 멕시코의 피부색은 선대의 식민지배와 후대의 사회계급을 지칭한다. 클레오는 짙은 피부색의 원주민, 쿠아론 집안은 백인 상류층이다. 영화 제목도 <리보>가 아니고, 영화 내용도 격란의 시대와 거리를 지녔던 도시 <로마>다. 동기의 단순성이든 계기의 순수성이든 결과는 정치적일 것이다.

img632그러므로 <로마>의 묘한 물리적 구성은 재현의 윤리 차원에서 먼저 다뤄져야 한다. 이 영화의 시청각적 목적은 그때를 빽빽하게 ‘재현하는 것’과 ‘찍고 있음’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다. 쿠아론이 자신의 직접적인 관심을 보존키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 봐도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쿠아론의 남긴 얼룩이 세척되는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극찬하는 <로마>의 첫 시퀀스는 결국 ‘개똥’을 치우는 장면이다. 그것도 하녀 클레오가 말이다. 쿠아론은 잘 알고 있다. 그 석제 바닥은 수많은 개똥의 흔적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위로 드리운 세제물에 일렁이는 형상이 ‘그때’의 얼룩이다. 쿠아론에게 <로마>는 개똥을 경유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유아론적 기억, 그 하녀의 보살핌과 떼어놓을 수 없는 유아론적 관심이다. 그리고 첫 시퀀스와 대조를 이루는 장면은 바다 시퀀스이다. 쿠아론과 여동생이 익사할 뻔한 실화이자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는 올해의 시퀀스다. 바다 시퀀스는 거대한 파도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개똥’같이 뭉치며 마무리된다. 다 그 하녀의 살신성인 덕분이다. 여기서 쿠아론이 말하고 싶은 건 갑자기 아빠에게 버려졌던 가족, 갑자기 애 아빠에게 버려진 하녀가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든지 치워질 수 있는 개똥같은 처지였지만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개똥을 생각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개똥의 연대’를 말하는 중이다.

물론, <로마>의 결말은 클레오가 옥상을 오르는 모습이다. 바다에서 가족들이 썼던 담요를 건조하러, 개똥 바닥에 일렁이던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첫 시퀀스와 대조를 이룬다. 쿠아론은 자신의 개똥같은 마음을 인정하고 그녀와 작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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