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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호 감독의 스토리지- 영화는 인생이다

하기호 감독의 스토리지- 영화는 인생이다

내 인생처럼, 내 글쓰기처럼 여자 친구를 사귀어도 난 오래 사귄다.

축구는 전쟁이고 야구는 인생이란 말이 있다. 나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지만 축구엔 관심이 많다.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인생, 즉 야구다. 한국 프로야구는 그리 흥미로운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흔히들 말하는 독재정권의 3S 정책(스포츠, 섹스, 스크린) 에 발맞춰 아직 프로야구 선수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티가 팍팍 나는 선수들로 시작했다. 몇몇 선수들을 미국이나 일본 리그에서 데려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명백한 아마추어였다. 어떤 선수는 타자로 3할을 치고 투수로 1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적도 있었다. 선수가 모자라 투수와 타자를 겸업시킨 결과였다.

한국의 프로야구는 그렇게 시작됐다
보무도 당당하게 양쪽 그라운드에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와서 각 팀 별로 줄을 맞춰 선 선수들은 흡사 북한군인들 같았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고 정정당당한 경기를 하겠다며, 선수 대표는 마치 사령관에게 관등 성명을 외치듯 엄청난 성량으로 선수 선서를 했다. 그것은 기필코 프로야구를 성공시켜 각하의 시름을 덜어 드리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시구 역시 그 시절의 대통령이 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그 장면을 찾아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하여튼, 한국의 프로야구는 그렇게 시작됐다. 부산, 하면 또 야구다. 어렸을 적엔 지금의 사직 구장이 아닌 구덕 야구장엘 갔었다. 그 뒤에 아파트가 있었다. 작은할아버지가 살던 곳으로 기억한다.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야구를 관람하기도 했다. 지금의 인천 문학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친척들은 80년대에 그랬다. 야구를 보며 삼겹살을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응원했다. 친척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고향 부산의 야구팀을 응원했다. 비극은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던 바로 그때부터였다. 나도 친구들처럼 팀을 정해야 했다. 그래야 어린이 회원에 가입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는 혈혈단신 마산에서 중학교를 마치신 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신 분이었다. 어느 날,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를 나에게 소개해줬다. 그는 일본 리그에서 꽤나 이름을 알렸던 백인천 선수라고 했다. 그는 글러브에 사인을 해서 나에게 선물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 벗겨진 머리, 야구 선수 치곤 엄청나게 튀어나온 곰 같은 뱃살, 짧은 다리…. 어딜 봐도 야구 선수 같지 않았다. 야구 선수라기보다는 씨름선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왜 저분은 씨름을 하지 않지? 천하장사는 거뜬할 텐데. 의아했다. 야구 선수로 뛰기엔 나이도 많았다. 나는 백인천 선수가 감독 겸 선수로 뛴다는 팀의 어린이 회원이 됐다. 아마 모기업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다른 팀처럼 영어로 지은 팀명이 아닌, 다소 유치하지만 ‘청룡’이라는 한국말로 지은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는 왜 백인천 선수를 나에게 소개해줬을까.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나의 야구 열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청룡은 개막전에서 엄청난 기적을 보여줬다. ‘5 대 0’이라는, 아마추어 야구였다면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할 열세를 뒤집어 버렸다. 그것도 씨름 선수 같은 백인천의 홈런으로 동점을 만든 뒤, 이종도 선수의 만루 홈런으로 역전승을 장식했다. 한국 프로야구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온 국민에게, 단 한 게임만으로, 그것도 개막전에서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백인천 선수는 경기 뒤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받은 설움을 토해내듯 애국심을 불태우며 울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이 고국에 와서 야구를 해보고 싶었고….” 왠지 나도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때부터 그 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기 시작했다. 백인천 선수가 안타를 치면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고 팀이 지는 날엔 밥도 먹지 않았다. 백인천 선수는 4할이 넘는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팀은 우승하지 못했다. 이기는 날보단 지는 날이 많았다. 어린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밥 먹기를 거부했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졌어! 안 묵어!” 아버진 “그래라, 닌 묵지 마라.”하며 혼자 맛있게 저녁을 드시곤 했다. 팀은 야구위원회의 전략대로 다른 기업에 팔렸다. 모기업이 방송국이 었으니 야구 중계가 훨씬 손쉬웠으리라. 프로야구가 본궤도에 오르자 유수의 대기업이 청룡을 인수했고 팀명 역시 영어로 바뀌었다. 그래도 나는 그 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나는 한 놈만 패는 스타일이다. 한 가지에 빠지면 헤어 나올 줄을 모른다. 이를 간파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며 살고 있다. “여자에 빠져도 좋다, 술에 빠져도 좋다, 남자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도박은 하지 마라. 가족들 굶기기 딱 이다.” 그래서 난 지금도 화투 그림도 볼 줄 모른다. 백인천 선수가 은퇴하고 팀이 대기업에 팔리자 아버진 당연하 다는 듯 부산연고의 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출장을 갔다던 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온 적이 있다. 부산 구장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날, 여느 때처럼 사이다 페트병에 소주를 가득 채워 숨기고 야구장에 잠입, 응원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화가 났겠지. 텔레비전에 나온, 그물에 매달려 울부짖는 이는 분명 아버지였다. 경상도 사투리로 뭐라 뭐라 외쳤을 거다. 그걸 서울의 집에서 본 나는 물고 있던 아이스바를 쭉 흘리고 말았다. 야구 해설가의 말이 귓구멍을 때렸다. “아, 저래선 안 되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는 프로 야구인데, 저러면 안 돼요. 저건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나는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때 먼 훗날 비슷한 장면이 영화 <해운대>(2009)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영화 공부를 시작한 이래, 아버지는 모든 한국영화를 다 챙겨 보셨지만 <해운대>는 끝내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셨다. 선동열과 최동원의 맞대결을 그린 <퍼펙트 게임>(2011)도 보지 못하셨다. 아마 보셨다면 무척 좋아하셨을 거다. 기억이 맞는다면 그 해, 내가 한 놈만 패겠다며 응원하는 팀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인 선수들의 활약으로 우승했다. 사람들은 그 팀을 ‘신바람 야구를 하는 팀’이라고 불렀다. 젊은 선수들은 패기에 넘쳐 야구를 했다. 나는 이미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야구팀은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었다. 그 후로 그 팀은 이해할 수 없는 감독 교체와 선수 조달, 그리고 의욕을 잃은 플레이로 수많은 게임을 지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에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후, 약간의 야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내 인생처럼, 내 글쓰기처럼 여자 친구를 사귀어도 난 오래 사귄다. 한 놈만 패야 하니까. 푹 빠지면 헤어 나올 줄을 몰랐으니까. 그때마다 여자친구가 뭘 해 달라 그러면 난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그 팀이 우승하면 해줄게.” 그건 아주 적절한 핑계였다. 그 팀은 우승할 리가 없는 팀이니까. 인터넷엔 “그 팀이 우승하면 결혼한다고 했어요. 잘했죠?” 따위의 농담들이 쏟아지곤 했다. 그만큼 그 팀은, 미래가 없었다. 마치 내 인생처럼. 내 글 쓰기 작업처럼. 작년에도, 그 작년에도, 그 그 작년에도, 그 팀은 별 볼 일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시나리오 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야구 따위엔 신경을 끊고 시나리오를 열심히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츰차츰 선수들이 달라지더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팀은 우승을 밥 먹듯 하는 팀과 승차 없이 1위를 달리고 있다. 나는 친 구들에게 그 팀이 소위 ‘가을야구’라 불리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시나리오도 어이없이 영화화 될 수 있을 거라고 농담하곤 한다. 애정은 있지만, 그건 황당한 기적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는 지금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야구는 인생이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야구는 계속될 것이다. 선수들의 기록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영구결번이 될 대스타도 있을 것이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대활약할 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상으로 아웃된, 기억 되지 않을 선수들이 더 많을 것이다. 컴퓨터의 ‘글 작업’ 파일을 열어 본다. 영화화된 시나리오라곤 데뷔작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 놈들이 안타를 쳐줄 것이라 믿는다. 홈런을 치는 놈도 나올지 모른다. 야구가 인생이듯 내가 쓴 시나리오에도 인생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이 세상의 소풍을 끝냈을 때 누군가가 이 파일들을 본다면…’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 친구, 겨우 이런 글 나부랭이 쓰느라 술 퍼마시고 그 지랄을 했던 거야?’로 기억되고 싶진 않다. ‘안타도 홈런도 못 쳤지만 야구 하나는 집요하게 팠네, 그래’라고 그렇게 기억되는 글들을 남기고 싶다. 그게 카메라를 돌리는 날을 기다리는 내 목표다. 덧붙이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우승 하길 바라지 않는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바라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난 그 팀 선수들로 인해 시원했다. 그거면 된 거다.
b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