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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들어진 사나이, 영화부산

부산에서 만들어진 사나이, 영화부산

부산에서 만들어진 나는, 그곳에서 꼭 자식을 낳겠다. 오해마시라. 언젠가는 반드시 부산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뜻이다.

나는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어려서부터 몸이 안 좋았던 내게, 어느 날 아버지가 내 출생의 비밀을 고백하셨다. 70년대 초반, 부산의 한 신발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급성 신장염에 걸려서 입원을 하게 됐단다. 그런데 병간호 하던 어머니와 (그 병중에도 그만) 불이 붙어 (병실에서!) 나를 만들었단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몸이 아픈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이 아플 때 거사를 치르는 바람에 내가 아픈 거라고. 그래서 미안타고.

그런 내게 영화에 대한 꿈이 만들어졌다
중학교 때 동시상영관을 들락거리다가 김수철이 음악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본 <칠수와 만수>. 아, 한국영화에서 여자를 벗기지 않다니. 근데 재미가 있다니! 막연했던 내 장래희망은 그날부터 영화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못했다. ‘몸이 약한 놈이 어떻게 영화를 할 것이냐’는 부탁성 협박과 ‘딴따라는 안 돼!’라는 강한 스매싱이 겁났다. 일반 대학엘 들어갔다. 대학생이 된 난 마치 고딩처럼 학교 간다고 나가 놓고 싸돌아 다녔다. 독일 문화원과 프랑스 문화원, 그리고 종로의 극장들, 때론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충무로를 거닐곤 했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연극원 한 번, 영상원 한 번, 도합 두 번의 낙방. 영화탄생 100주년 하고도 1년이 지난 1996년, 겨우 영상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21세기는 영상의 시대가 될 거라는 둥, 소주병을 앞에 놓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어쨌든 말이 되게 지껄여야 했다. 부산에서 나를 만드신 아버지는 말했다. “그래, 그 학원 수강료는 을마고?”

영상원에 입학하자 부산국제영화제가 만들어졌다
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였다. 그 땐 연애 중이었다. 데이트 삼아 부산에 갔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놀았다. 술을 마시고 해운대를 거닐고 복국을 먹었다.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첫해, 부산 국제영화제는 뭔가 엉성하고 영사 사고도 빈번했지만, 내게 <안토니아스 라인>을 선물했다. 2회 부산국제영화제. 다시 부산을 찾았다. 그 땐 막 실연당한 상태였다. 당연히 영화보단 ‘놀자’였다. 부산이 고향인 형들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당시만 해도 콘도 뒤쪽 어디쯤에 윤락가가 있었다. 길가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같이 피우다가 부산이 고향인 M형이 말했다. “니, 저기 함 갈래? 여자는 여자로 잊어야 하는긴데. 돈은 내가 내준다!”거친 유혹이었다. 하지만 난 거절했다.(진짜다.) 그해 부산 국제영화제는 훗날 한국영화로 리메이크 된 <비밀의 화원>, 술이 덜 깬채 극장에 들어갔다가 충격 먹어 잠과 술을 다 깨게 만든 <하나비>, 수오 마사유키의 달콤한 <쉘 위 댄스>를 내게 선물했다. 그 후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지 않기로 했다. 내 영화가 걸리지 않는 이상 가지 않겠다는 나름의 결심이었다.(하지만 그 후로도 서너 번쯤은 더 갔을 것이다.) 그리고 졸업을 했고, 정글에 나왔다.

그 후로 부산엔 ‘그냥’갔다. 시나리오를 쓰다가 막힐 때면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그곳으로 향했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무조건 해운대로 달렸다. 바다하면 해운대여야만 했다. 특히 봄이 되면 도다리를 먹겠다고 갔다. 왜 바다를 찾아 꼭 그 먼 곳으로 가야 하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부산에서 만들어진 나에게 그곳은 엄마 품 같은 도피처가 아닐까 싶다. 언제 데뷔할지 알 수 없는 시간들, 그 틈틈이 부산을 찾았다.

드디어 데뷔영화를 만들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쓴 소주를 마시는 날들이 이어졌다. 부산에서 날 만드신 아버지는 내 데뷔작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 말씀은 “니 언제 데뷔하노?”였다. 만약 그분이 극장에 걸린 내 영화를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친구 차를 빌려 전국을 떠돌다 도착한 해운대 앞바다가 말을 걸어왔다. 아마 ‘내는 좋다, 니 영화가 최고인기라’하지 않았을까… 파도가 말했다. 영화감독이 되는 걸 허락하신 그는 아마도 너를 이곳에서 만들 때의 미안함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갈매기가 질문했다. 툭툭 털고 일어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간건 두 달 전이었다. 혼자였다. 해변에 앉아 바다와 갈매기를 구경했다. 이곳저곳을 할 일 없이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바다는 여전히 질문을 던졌고, 부산은, 여전히 따뜻했다

부산에서 만들어진 나는, 그곳에서 꼭 자식을 낳겠다. 오해마시라. 언젠가는 반드시 부산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뜻이다.
bfc

하기호 <라듸오 데이즈> 각색/감독. 해장삼아 백팔배를 하며 때때로 금강경을 읽음.데뷔 이후, 1년에 두 편씩 시나리오를 쓰고 있음. 탈고할 때마다 세계 최고의 적금을 부었다 생각함. 국회의원 15년간 2건의 법안을 발의한 어떤 이에 비하면 나름 잘 살고 있다 생각하며 ‘진짜 준비된 감독’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