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설렘, 흰여울문화마을

평범한 달동네처럼 보이던 흰여울문화마을이 지금에 와서 달라 보이듯, 어느 순간 우리 옆에 항상 있었던 그 누군가가 달리 보일 수 있다.

설렘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첫사랑을 대면했을 때 느끼는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의 감정들은 평생 동안 잊히지 않는 기분 좋은 기억이 된다. 삶이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은 우울한 순간에도 설렘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면 눈부시게 푸른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설렘의 감정은 주로 새로운 것을 접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설렘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설렘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대부분의 일이 늘상 해왔던 익숙한 것들의 반복이고, 오랫동안 보아왔던 사람들만 골라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접했을 때도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쉽게 판단을 내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익숙하고 편안하면서도 단조로운 생활이 이어질 때가 많다. 이렇게 되면 삶은 권태로워진다.

그런데 설렘은 꼭 새로운 것을 접하는 순간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물들, 장소들, 사람들을 접할 때도 설렘의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익숙했던 그들에게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될 때 설렘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오래된 동네의 모퉁이 골목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를 통해서도 그 동네가 새롭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현명해진다는 건, 오래된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흰여울문화마을은 생긴 지 꽤 오래된 마을이다. 송도에서 남항대교를 건너 영도로 들어서면 해안을 끼고 있는 축대 위의 마을이 흰여울문화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아슬아슬한 해안 절벽 위에 집을 지어 이룬 곳이다. 마을에는 피란민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급하게 지어 올린 작은 판잣집들이 많은데, 이들 집들이 꼬막을 닮았다 해서 꼬막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특별할 것이 별로 없는 이 마을이 최근 도시재생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마을의 담과 벽을 흰색으로 덧칠하여 마을은 판타지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근사한 마을로 탈바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흰여울문화마을에 와서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img563흰여울문화마을의 ‘흰여울’이란 이름은 예전에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리는 모습이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과 같다 하여 생긴 것이다. 최근 마을 골목의 담과 벽이 흰색으로 바뀌면서 흰여울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는 곳이 되었다. 흰여울문화마을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 중 하나는 2013년에 개봉하여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의 촬영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은 상고 출신의 변호사로 앞뒤 재지 않고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7년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언젠가 꼭 이 빚을 갚으리라 생각했던 돼지국밥집 아줌마 순애(김영애 분)가 그를 찾아온다. 순애의 아들 진우(임시완 분)는 국가보안법 위반 공안 사범이 돼 있었고, 교도소에서 마주친 멍투성이의 그를 보고 우석은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한다. 흰여울문화마을에는 우석이 했던 대사가 영화 속 순애의 집이었던 곳의 담벼락에 적혀 있다.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할게요! 변호인 하겠습니다.”

세무 전문 변호사로 많은 돈을 벌고 있던 변호사 송우석이 국가보안법 관련 시국사건의 변호인을 맡기까지에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익숙한 안락함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할 때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이 뒤따른다. 설렘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동반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에는 설렘에서 오는 호기심과 매혹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혹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도 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 시대적 상황이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끈 것이다.

“역사가와 그가 선택한 사실의 상호작용은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 사이의 대화다.” 이 구절은 <변호인>에서 검찰에 의해 불온서적 중 하나로 언급된 책 <역사란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쓴 책이다. 대학 신입생 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설렘이 기억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는 주장이 그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상식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설렘이란 감정도 역사와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오래된 낡은 것이 새롭게 보이고, 그것 때문에 ‘다시 설렘’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이다. 변화가 없어 보이는 마을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리 보일 수 있다. 변화는 무뎌진 감정에도 다시 설렘을 가져다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다. 평범한 달동네처럼 보이던 흰여울문화마을이 지금에 와서 달라 보이듯, 어느 순간 우리 옆에 항상 있었던 그 누군가가 달리 보일 수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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